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윤집궐중(允執厥中)/이태호

윤집궐중(允執厥中)/이태호


소 설가 이병주는 역사와 신화에 관한 탁월한 비유를 남겼다. 즉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햇볕에 바랜 자료는 탈색이 되어 고색창연한 느낌을 주지만 달빛에 물든 자료는 환상적이며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신세대는 역사보다는 신화를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중 국 역사상 삼황오제시대(三皇五帝時代)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갈 무렵의 신화 또는 전설시대에 속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이 시대에 일어난 일을 선사시대(先史時代)의 것으로 기록한다. 역사학자나 역사학도들은 사료(史料)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일을 경시하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제학도들이 “역사가 밥 먹여주나?”라고 힐난한다든가, 미학도들이 “역사보다 예술이 멋있어”라고 뽐내는 데서 역사의 영역은 한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시대(歷史時代)의 잣대만으로 광대무변한 인간의 정신문화를 잴 수는 없다.

오 제시대(五帝時代)에 속하는 요순(堯舜)의 통치는 역사의 고금과 지리의 동서를 뛰어넘어 하나의 이상적 표준을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요순은 선사시대에 속한 통치자였지만 중국의 삼경(三經)의 하나인 <서경(書經)>과 사마천의 <사기> 등에 그 업적이 기록된 성군(聖君) 또는 현인(賢人)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통치시대는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전형을 이루었다.

< 서경>은 백성들에게 정신적 행복과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 요와 순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토록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질고 능력이 있는 신하를 점찍어 그에게 대권을 선양한 미덕을 기록하고 있다. 요순의 이러한 행적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거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인간의 혈족 보존 및 자녀 사랑 본능을 여지없이 뛰어넘은 공적 처신(公的 處身)의 표양으로서 인류의 역사에 큰 획(劃)을 그었다.

요 는 방제란 신하가 왕의 아들인 단주(丹朱)를 천거했으나 아들을 “완악하고 말다툼이나 하는 자”로 평가하고 신하인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행정 능력이 뛰어난 순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후 한참 있다가 후계자로 삼았다. 요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두 명이나 순에게 보내 함께 살게 한 것은 그만큼 순을 탐내 사위로 삼고 싶었다기보다는 두 딸로 하여금 네 눈으로 순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케 하고 그것을 토대로 공적인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순 은 우의 후계 지명을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요가 노쇠하여 통치하기 어렵게 되자 할 수 없이 즉위하여 요와 일치된 선정(善政)을 베풀면서 백성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착하고 능력 있는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백성들의 행복을 극대화했다. 특히 그는 동서남북에 있는 명산을 찾아가 대자연에 제사지내고, 치산치수에 힘쓰는 한편 형정(刑政)을 정비하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형벌을 유연하게 집행하고 힘이 있거나 악질적인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게 집행하여 백성이 공포심을 갖지 않도록 배려했다.

순 또한 아들 상균(商均)이 있었지만 그를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고 덕이 있고 능력이 출중한 우(禹)라는 신하를 주목하는 한편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들여 우에게 대권을 부여했다. 순이 우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전에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은미한 것이니 오직 정신을 집중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거머쥐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유명한 계명(誡命)을 남겼다. 이것은 음미할수록 심오하며, 통치와 행복의 요체를 설명하는 간결하고 명쾌한 진술이다.

기 독교의 천지창조론(天地創造論)은 신(神)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했으며 “보시기에 좋았다”는 신(神)의 기쁨에 근거하여 인간의 본성을 본래 착한 것으로 묘사한다. 유교의 인성론은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의 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여 무수한 인간의 성품을 살피면―특히 권력가와 재산가일수록―사리사욕에 투철하고 공덕심이 박약하며 못가진 자들을 짓밟거나 등치는 예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악한 측면이 있음은 분명하다. 순은 그것을 선악의 차원을 넘어선 ‘위(危)’ 즉 위태로운 차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 편 도심(道心) 즉 도의 마음은 어떤가? 도 즉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 윤리, 도덕, 진리는 우리가 짐작하듯이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도는 명확한데 수시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 사회 환경, 포악한 인간 말종들의 횡포 등으로 인해 도의 드러남이 확연치 않게 보일 수 있다. 순은 이런 현상을 ‘미(微)’ 즉 희미하다는 한 마디로 정의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정말로 도통(道通)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이 분야에 발을 디딘 사람은 깨달을 수 있다.

그 러므로 순은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유정유일(惟精惟一) 즉 오로지 정신을 하나로 바짝 차리고 윤집궐중(允執厥中) 즉 진실로 한 가운데를 붙잡으라고 설파한다. 세상의 문제점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것을 뚫고 들어가 문제를 파헤치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대담한 발상이 이 진술에 담겨있는 것 같다. 깨달음이 더디고 아는 것이 부족한 나는 윤집궐중의 핵(核)이라 할 수 있는 중(中) 즉 ‘가운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첫 째, 중(中)은 진리(眞理)다. 사람들은 흔히 “진리는 영원하다” 또는 “영원하지 않은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진리에도 차원이 있다. 그 진리는 차원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다. 진리는 신(神)이나 학문이나 인간의 도덕 등에 존재한다. 진리의 종류가 다양한 이상 전 세계에 단 하나의 진리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허위라는 법칙은 없다. 그러므로 진리의 소재를 규명하고 그 차원을 분석하여 최고의 또는 보다 높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면서 낮은 차원의 진리를 포용하는 사람은 위대하다.

진 리(眞理)와 상충되는 개념은 허위(虛僞), 사도(邪道), 패악(悖惡) 등이다. 허위란 진짜처럼 꾸민 가짜(요즘 유행어로는 ‘짝퉁’), 날조, 거짓말, 표리부동한 작태 등을 포함한다. 사도란 정도를 벗어난 사특한 교리, 사람을 홀리는 짓, 신(神)의 권위를 빙자한 모리행위(謀利行爲) 등을 포함한다. 패악이란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책동하는 마귀, 인류의 행복을 위협하거나 말살하려는 전쟁광, 독재자 및 그들에게 빌붙어 단물을 빨아먹으려는 기생충 같은 자, 약자를 짓밟아 ‘벼룩의 간’을 빼먹는 무뢰한 등을 포함한다.

둘 째, 중(中)은 핵심(核心)이다. 핵심은 위대한 진리의 요체다. 그것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잡하게 뒤얽힌 사회 환경과 이해득실이 충돌하는 인간사와 학설 또는 가설이 난무하는 학문 세계와 냉엄한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일이 잘 되었다면 그렇게 된 가장 큰 요인은 하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그것을 잘 살려가면 좋고, 후자는 그것을 시정하여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핵심이 항상 중앙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핵 심(核心)과 상반되는 개념은 변방(邊方), 표피(表皮), 탈선(脫線) 등이다. 변방이란 중심에서 벗어나 변죽을 울리는 힘,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불만세력, 진리를 훼손하고 전복하려는 세력의 근거지를 포함한다. 표피란 핵심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 겉만 화사한 치장, 어수룩한 사람을 현혹하는 언동 등을 포함한다. 탈선이란 변방과 표피를 오가며 착한 사람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행위, 자포자기의 마음가짐, 도박과 색정과 모반과 파괴 등 이판사판의 짓꺼리를 포함한다.

셋 째, 중(中)은 형평(衡平)이다. 양쪽에 물건을 달고 있는 저울은 수평을 유지할 때 안정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중심을 잡은 사람은 결코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형평은 공정, 공평, 평등과도 일맥상통한다. 높은 사람은 지극히 겸손함으로써 낮은 사람과 형평을 유지하고,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과 나눔으로써 형평을 유지하며, 영성이 깊은 사람은 확성기 앞에서 설치지 않고 자신을 지극히 낮춰 은은한 사랑을 전함으로써 형평을 간직하고, 지혜롭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무지한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을 가르침으로써 형평을 갖추며, 남녀노소도 이웃들과 진심을 통함으로써 형평을 도모할 수 있다.

형 평(衡平)과 상극을 이루는 개념은 편견(偏見), 편애(偏愛), 편중(偏重) 등이다. 편견이란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깔아뭉개는 것, 허위와 사도와 패악을 진리로 맹신하는 것, 변방과 표피와 탈선을 핵심으로 착각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편애란 편견에서 더 나아가 한 대상에 깊이 빠져드는 것,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 반해 모든 것을 홀랑 바치는 것, 사랑을 거래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편중이란 자신이 편견을 갖고 편애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허위의 바벨탑을 쌓는 것, 편견으로 편애하는 대상에게 넋을 빼앗겨 자신을 해체하는 것, 그리하여 허위, 사도, 패악으로 함몰돼 자신과 공동체를 망치는 것 등을 포함한다.

나 는 순(舜)이 우(禹)에게 남긴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은미한 것이니 오직 정신을 집중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거머쥐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교훈을 바르게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러한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자신을 비추고 또 비추면서 살아가련다.


(출처 : 야후 블로그 ‘작은영혼’ 2009.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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